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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방촌(厖村) 황희(黃喜)의 묘이다. 선생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翼成)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희(黃喜)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에 개성에서 출생하여 27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이 되었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으로 왕이 직접 벼슬을 내렸다. 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태종(太宗)대에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세종(世宗)대에는 20여년 동안 국정을 총리하는 의정부(議政府)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봉분 역시 규모가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여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護石)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향로석이 밀착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4개의 화창(火窓)이 투각된 장명등이 있다. 봉분좌측에 묘갈이 위치하며 그 아래로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설치되어 있다. 묘역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원모재(遠慕齋) 앞 언덕에 신도비가 있는데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졌으며 신숙주(申叔舟)가 짓고 안침(安琛)이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며 옆에 1945년에 다시세운 신도비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 위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88번길 23-81

✏ 상세 정보

화장실

있음

🔎 이용 안내

문의 및 안내
031-940-5806
주차 시설
있음
유모차 대여 여부
불가
신용카드 가능 여부
없음
애완동물 가능 여부
불가
쉬는 날
연중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