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암(태안)
📍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원이로 78-132
소개
태을암은 국보로 지정된 태안 마애삼존불로 유명한 사찰이다. 태안에서 가까운 서산에는 백제의 미소라 부를 만큼 볼우물 가득 웃음을 머금고 환하게 웃는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데, 이에 비해 태안의 마애삼존불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친근하면서도 소박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구나 일반적인 삼존불형식은 중앙에 본존불을 모시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데, 태안 마애삼존불은 중앙에 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으로 주목되고 있다. 때문에 그동안 이 태안마애삼존불은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었으나, 근래에 서산마애불보다 더 오랜 고식의 조각수법을 보이는 등 시대가 더 올라가는 것으로 판단되어 국보로 승격, 재지정하게 되었다.
태을암이 있는 태안은 서해안에 위치해 있어서 중국의 앞선 문물이 들어올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항상 왜구가 출몰하여 근심이 많았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 때문에 태안은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다른 지역보다 빨리 태안마애불과 같은 우수한 불교문화를 조성할 수 있었다. 아울러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원래 경상북도 의성현에 있던 단군의 영정을 모신 태일전을 옮겨와 이곳에 봉안함으로써, 단군의 가호를 받아 민생 안정을 도모하려는 상징적인 의미도 부여하였다.
물론 이렇게 옮겨 온 태일전과 백제시대에 조성한 마애삼존불상이 서로 직접 연관되는 것이 아니지만, 바다에서의 안녕과 불교에 귀의한다는 면에서는 일정부분 공유하는 면이 있다. 지금도 태을암에 가면 백제의 마애불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곳에 서서 백제시대에 서해를 통해 들어오던 중국의 문화를 생각하게 되고, 아울러 바닷가로부터 쳐들어오던 왜구의 침략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막으려던 조상들의 슬기가 느껴진다.
* 역사
양식상으로는 중국 북제 불상양식의 계통을 따르고 있어 제작연대는 7세기 초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 당시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역에서 다리 역할을 하였던 태안반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새로운 석굴사원 양식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절이 창건된 것은 고려시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는 왜구가 서해안에 출몰하며 한창 기승을 부릴 당시인데, 바닷가에 면한 태안 지방은 인근의 서산과 마찬가지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어 군민 대부분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할 정도였다. 이 같은 사정은 조선이 개국되면서 많이 좋아져, 1413년(태종 13) 태안군이 되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1479년(성종 10) 경상북도 의성현에 있던 태일전을 이곳 백화산으로 옮기고 그 때 함께 이운한 단군 영정을 봉안하게 하였다. 그것은 곧 국조신이랄 수 있는 단군을 이곳으로 모셔옴으로써 그의 가호를 받아 민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옮겨 온 태일전 아래에는 백제시대에 조성한 마애삼존불상이 있었으나, 태일암과는 직접적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일전은 이렇듯 바다의 안녕을 바라는 목적이 짙었는데, 그러나 실제 거리가 연해와는 다소 먼 곳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을 느꼈다. 더욱이 태일전은 경상도 의성현의 빙혈 옆에 있어 매년 정월 보름날에 임금이 향을 내려 제사를 지냈으나 성종 9년(1478)에 태안군으로 옮겼으며, 태안군에서는 성종 10년(1479)에 도착하여 백화산의 고성에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1480년 태일전은 그대로 두고 단군 영정만 안흥진 성안으로 이안하였고, 남은 태일전 건물에는 불상을 모시고 태을암이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태을암이 창건된 것이다.
현재 태일전터의 구체적인 형상을 추론할 수 있는 흔적은 없다. 다만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태일전터로 전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 비하여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어서 관련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태일전 아래에는 마애삼존불상이 있으므로 절을 창건하기에는 적합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약 800여 년간이 지나니 건물은 점차 퇴락되어 가는데, 그 규모가 워낙 크므로 쉽사리 중수하기에 벅찼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최근에는 1978년 법당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절에서 서쪽으로 10여m 지정에 태안마애삼존불상이 봉안된 보호각이 있다.
태을암이 있는 태안은 서해안에 위치해 있어서 중국의 앞선 문물이 들어올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항상 왜구가 출몰하여 근심이 많았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 때문에 태안은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다른 지역보다 빨리 태안마애불과 같은 우수한 불교문화를 조성할 수 있었다. 아울러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원래 경상북도 의성현에 있던 단군의 영정을 모신 태일전을 옮겨와 이곳에 봉안함으로써, 단군의 가호를 받아 민생 안정을 도모하려는 상징적인 의미도 부여하였다.
물론 이렇게 옮겨 온 태일전과 백제시대에 조성한 마애삼존불상이 서로 직접 연관되는 것이 아니지만, 바다에서의 안녕과 불교에 귀의한다는 면에서는 일정부분 공유하는 면이 있다. 지금도 태을암에 가면 백제의 마애불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곳에 서서 백제시대에 서해를 통해 들어오던 중국의 문화를 생각하게 되고, 아울러 바닷가로부터 쳐들어오던 왜구의 침략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막으려던 조상들의 슬기가 느껴진다.
* 역사
양식상으로는 중국 북제 불상양식의 계통을 따르고 있어 제작연대는 7세기 초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 당시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역에서 다리 역할을 하였던 태안반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새로운 석굴사원 양식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절이 창건된 것은 고려시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는 왜구가 서해안에 출몰하며 한창 기승을 부릴 당시인데, 바닷가에 면한 태안 지방은 인근의 서산과 마찬가지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어 군민 대부분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할 정도였다. 이 같은 사정은 조선이 개국되면서 많이 좋아져, 1413년(태종 13) 태안군이 되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1479년(성종 10) 경상북도 의성현에 있던 태일전을 이곳 백화산으로 옮기고 그 때 함께 이운한 단군 영정을 봉안하게 하였다. 그것은 곧 국조신이랄 수 있는 단군을 이곳으로 모셔옴으로써 그의 가호를 받아 민생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옮겨 온 태일전 아래에는 백제시대에 조성한 마애삼존불상이 있었으나, 태일암과는 직접적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일전은 이렇듯 바다의 안녕을 바라는 목적이 짙었는데, 그러나 실제 거리가 연해와는 다소 먼 곳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을 느꼈다. 더욱이 태일전은 경상도 의성현의 빙혈 옆에 있어 매년 정월 보름날에 임금이 향을 내려 제사를 지냈으나 성종 9년(1478)에 태안군으로 옮겼으며, 태안군에서는 성종 10년(1479)에 도착하여 백화산의 고성에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1480년 태일전은 그대로 두고 단군 영정만 안흥진 성안으로 이안하였고, 남은 태일전 건물에는 불상을 모시고 태을암이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태을암이 창건된 것이다.
현재 태일전터의 구체적인 형상을 추론할 수 있는 흔적은 없다. 다만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태일전터로 전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 비하여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어서 관련 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태일전 아래에는 마애삼존불상이 있으므로 절을 창건하기에는 적합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약 800여 년간이 지나니 건물은 점차 퇴락되어 가는데, 그 규모가 워낙 크므로 쉽사리 중수하기에 벅찼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최근에는 1978년 법당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절에서 서쪽으로 10여m 지정에 태안마애삼존불상이 봉안된 보호각이 있다.
🗺 위치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원이로 78-132
🔎 이용 안내
문의 및 안내
041-672-1440
유모차 대여 여부
불가
신용카드 가능 여부
없음
애완동물 가능 여부
없음
쉬는 날
연중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