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병조형유허비
📍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안길 19
소개
* 취병 조형선생을 기리는 비, 취병조형 유허비 *
취병선생 유허비는 광산구 비아동에 위치한 작은 공원 내에 있다. 비(碑)의 형식은 화강석 1매에 비(碑)의 지붕과 몸체[碑身]를 함께 조성하였고 기단은 별개의 돌이다. 특징은 높이보다 너비가 긴 가로형태의 양식인 점이다. 즉 비의 총높이 95cm, 너비 120cm, 두께 28cm이며 문기(文記)는 모두 346자(字)로 음각문(陰刻文)이다.
* 한일관계사의 주요 자료 부상일기의 조형 선생 *
조형(趙珩)(1606∼1679년)은 조선시대 현종(顯宗)때의 문신으로 자(字)는 군헌(君獻), 호(號)는 충정(忠貞)이며 본관(本貫)은 풍괴(豊壞)이다. 1630년(인조8년) 명경관(明經科)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재임할 때 허목(許穆)의 사건에 관련되어 부여(扶餘)에 귀양갔다. 1655년 대사간 겸 통신상사(通信上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병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1675년 장열대비의 복제문제로 인하여 경기도 양주(楊洲)에 추방되었다. 1665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 《부상일기(扶桑日記)》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17세기 한일(韓日) 관계사의 중요 자료이다. 현재 하남의 안청동에는 풍양 조씨는 살고 있지 않으며 조형 선생의 후손은 없고 경기도에 친, 인척이 있다고 하지만 유허비는 방치되어 왔다. 광주 출신으로서 여러 역사서에 기록된 인물도 흔치 않고, 또한 광주시 일원에는 학술적 가치를 가진비는 더욱 없으므로 이 비는 취병선생에 대한 연구와 지방사 연구(地方史 硏究), 금석학(金石學)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소유자 - 국유
* 수량 - 1기
* 시대 - 1873년(조선 고종 10년)
취병선생 유허비는 광산구 비아동에 위치한 작은 공원 내에 있다. 비(碑)의 형식은 화강석 1매에 비(碑)의 지붕과 몸체[碑身]를 함께 조성하였고 기단은 별개의 돌이다. 특징은 높이보다 너비가 긴 가로형태의 양식인 점이다. 즉 비의 총높이 95cm, 너비 120cm, 두께 28cm이며 문기(文記)는 모두 346자(字)로 음각문(陰刻文)이다.
* 한일관계사의 주요 자료 부상일기의 조형 선생 *
조형(趙珩)(1606∼1679년)은 조선시대 현종(顯宗)때의 문신으로 자(字)는 군헌(君獻), 호(號)는 충정(忠貞)이며 본관(本貫)은 풍괴(豊壞)이다. 1630년(인조8년) 명경관(明經科)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재임할 때 허목(許穆)의 사건에 관련되어 부여(扶餘)에 귀양갔다. 1655년 대사간 겸 통신상사(通信上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병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1675년 장열대비의 복제문제로 인하여 경기도 양주(楊洲)에 추방되었다. 1665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와 《부상일기(扶桑日記)》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17세기 한일(韓日) 관계사의 중요 자료이다. 현재 하남의 안청동에는 풍양 조씨는 살고 있지 않으며 조형 선생의 후손은 없고 경기도에 친, 인척이 있다고 하지만 유허비는 방치되어 왔다. 광주 출신으로서 여러 역사서에 기록된 인물도 흔치 않고, 또한 광주시 일원에는 학술적 가치를 가진비는 더욱 없으므로 이 비는 취병선생에 대한 연구와 지방사 연구(地方史 硏究), 금석학(金石學)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 소유자 - 국유
* 수량 - 1기
* 시대 - 1873년(조선 고종 10년)
홈페이지
🗺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안길 19
🔎 이용 안내
문의 및 안내
062-960-8252
주차 시설
없음
유모차 대여 여부
없음
신용카드 가능 여부
없음
애완동물 가능 여부
가능
쉬는 날
연중무휴
이용 시간
상시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