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대전)
📍 대전광역시 서구 가수원로 71-12
소개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마곡사에 속한 말사이다.
본래 용화사는 충남 논산군 두마면 용동리 533-1번지에 소재하였던 절로써 신라 제 27대 선덕왕 때 영포화상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관음사(觀音寺)라 불렀다 한다. 그 후 태조2년 무학국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조선시대 말기에 황해도 해주에서 온 홍응은이란 비구니스님이 옛 터에 다시 짓고 이름을 금륜사(金輪寺)로 바꾸었다. 1946년 대강사인 김경봉 스님이 다시 절 이름을 용화사(龍華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1978년 법당이 붕괴되자 현 주지 갈영진 스님이 다시 지었다. 당시의 용화사는 동학사, 갑사,신원사,구룡사와 함께 계룡산의 5대 사찰로 불릴 만큼 큰절이었다. 그러나 육군본부를 비롯한 군 시설이 신도안으로 이전하여 옴에 따라 1984년 가수원동의 현 위치로 옮겨졌다. 절은 법당 건물인 대웅전과 오른편의 요사채로 이루어졌으며 그사이에 탑이 서 있다. 대웅전은 시멘트로 지어 기와를 올린 것으로 양 옆면과 뒷 벽면에 간략히 부처의 생애를 내용으로 하는 팔상도를 그려 놓았다. 내부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놓여 있다. 대웅전에는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모두 5점의 탱화가 있다.
우측 벽면에 걸린 신중탱화를 비롯 칠성탱화와 독성탱화는 모두 1933년에 조성된 것으로 신도안의 금륜사 이었을 때이다. 독성탱화 앞에는 그림을 닮은 돌로 만들어진 노인상이 놓여 있다. 산신탱화는 1936년에 조성된 탱화로 본래 경기도 광주군 수도산(修道山)에 있는 봉은사(奉恩寺)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한 손에 파초선을 들고 두건을 쓴 노인으로 나타낸 산신과 왼편에 민화풍의 호랑이, 오른편에 동자 두 명이 서 있다. 소나무와 물결 및 높고 험한 산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대웅전 오른편에 서 있는 4층 석탑은 신도안에서 옮겨 온 것이다. 각 층의 비례감이 적어 전체적으로 매우 길쭉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2층 기단에 올린 각 층의 옥개석은 양끝이 힘 있게 위로 휘어져 올라갔고, 상륜부는 복발만 남아 있다. 맨 상층의 옥신은 석질이 다르다.
평평히 다듬은 돌에 도드라지게 새긴 여래좌상이 요사채 벽면에 기대어 있다. 세로로 금이 가 두 조각난 상태이다. 배례석으로 썼음직한 연꽃이 새겨진 장방형의 받침돌에 올려져 있다. 전반적으로 많이 닳아 법의와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지 않으나 배에 위치한 왼손 바닥에 든 약합이 약사여래임을 말한다. 절 입구 왼편에는 자연석에 새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비의 앞면 윗쪽에 작은 글씨로 '백(白)' 그 밑에 큰 글씨로 '하마(下馬)'라 새겼다. 뒷면에는 앞과 다른 글씨체로 새긴 '갑자(甲子)' 란 글이 있다. 본래 이 비는 신도안(두마면 용동리 516번지)에 있던 단성전(檀聖殿) 혹은 단군전(檀君殿)이라 불리던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 1905년에 지어진 단성전은 이진택이란 사람이 단군과 공자의 초상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던 곳이다.
본래 용화사는 충남 논산군 두마면 용동리 533-1번지에 소재하였던 절로써 신라 제 27대 선덕왕 때 영포화상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관음사(觀音寺)라 불렀다 한다. 그 후 태조2년 무학국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조선시대 말기에 황해도 해주에서 온 홍응은이란 비구니스님이 옛 터에 다시 짓고 이름을 금륜사(金輪寺)로 바꾸었다. 1946년 대강사인 김경봉 스님이 다시 절 이름을 용화사(龍華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1978년 법당이 붕괴되자 현 주지 갈영진 스님이 다시 지었다. 당시의 용화사는 동학사, 갑사,신원사,구룡사와 함께 계룡산의 5대 사찰로 불릴 만큼 큰절이었다. 그러나 육군본부를 비롯한 군 시설이 신도안으로 이전하여 옴에 따라 1984년 가수원동의 현 위치로 옮겨졌다. 절은 법당 건물인 대웅전과 오른편의 요사채로 이루어졌으며 그사이에 탑이 서 있다. 대웅전은 시멘트로 지어 기와를 올린 것으로 양 옆면과 뒷 벽면에 간략히 부처의 생애를 내용으로 하는 팔상도를 그려 놓았다. 내부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놓여 있다. 대웅전에는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모두 5점의 탱화가 있다.
우측 벽면에 걸린 신중탱화를 비롯 칠성탱화와 독성탱화는 모두 1933년에 조성된 것으로 신도안의 금륜사 이었을 때이다. 독성탱화 앞에는 그림을 닮은 돌로 만들어진 노인상이 놓여 있다. 산신탱화는 1936년에 조성된 탱화로 본래 경기도 광주군 수도산(修道山)에 있는 봉은사(奉恩寺)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한 손에 파초선을 들고 두건을 쓴 노인으로 나타낸 산신과 왼편에 민화풍의 호랑이, 오른편에 동자 두 명이 서 있다. 소나무와 물결 및 높고 험한 산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대웅전 오른편에 서 있는 4층 석탑은 신도안에서 옮겨 온 것이다. 각 층의 비례감이 적어 전체적으로 매우 길쭉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2층 기단에 올린 각 층의 옥개석은 양끝이 힘 있게 위로 휘어져 올라갔고, 상륜부는 복발만 남아 있다. 맨 상층의 옥신은 석질이 다르다.
평평히 다듬은 돌에 도드라지게 새긴 여래좌상이 요사채 벽면에 기대어 있다. 세로로 금이 가 두 조각난 상태이다. 배례석으로 썼음직한 연꽃이 새겨진 장방형의 받침돌에 올려져 있다. 전반적으로 많이 닳아 법의와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지 않으나 배에 위치한 왼손 바닥에 든 약합이 약사여래임을 말한다. 절 입구 왼편에는 자연석에 새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비의 앞면 윗쪽에 작은 글씨로 '백(白)' 그 밑에 큰 글씨로 '하마(下馬)'라 새겼다. 뒷면에는 앞과 다른 글씨체로 새긴 '갑자(甲子)' 란 글이 있다. 본래 이 비는 신도안(두마면 용동리 516번지)에 있던 단성전(檀聖殿) 혹은 단군전(檀君殿)이라 불리던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 1905년에 지어진 단성전은 이진택이란 사람이 단군과 공자의 초상을 모셔놓고 제향을 올리던 곳이다.
🗺 위치
대전광역시 서구 가수원로 71-12
🔎 이용 안내
문의 및 안내
042-673-2316
유모차 대여 여부
없음
신용카드 가능 여부
없음
애완동물 가능 여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