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신채호사당 및 묘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 (낭성면)
소개
* 단재 신채호를 모시는 곳, 신채호사당 *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모신 사당으로 1978년에 건립된 것이다. 1981년 이곳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단재영당(丹齋影堂) 혹은 단재영각(丹齋影閣)으로 불린다. 영정은 한광일(韓光一)이 그린 것으로 가로 70cm, 세로 110cm이다. 입구의 외삼문(外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으로 ‘精氣門(정기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나란히 놓인 3개의 석조계단 위에 ‘丹齋影閣(단재영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본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물림집으로 마루가 깔린 통칸방에 분합문(分閤門)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사당 주변에는 기와를 올린 나즈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신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집터였던 사당 뒤쪽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호석이 없는 아담한 봉분 앞에 한용운(韓容雲), 오세창(吳世昌), 신백우(申伯雨) 등이 세운 묘표(墓表)와 상석(床石)을 놓았다. 상석 오른쪽에는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고 봉분의 정면 중앙에는 명등석(明燈石) 1기,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서 있다.
* 민족주의자 단재 신채호에 대하여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다 1929년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중국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옥사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主筆)로 활약하면서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이며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모신 사당으로 1978년에 건립된 것이다. 1981년 이곳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단재영당(丹齋影堂) 혹은 단재영각(丹齋影閣)으로 불린다. 영정은 한광일(韓光一)이 그린 것으로 가로 70cm, 세로 110cm이다. 입구의 외삼문(外三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으로 ‘精氣門(정기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나란히 놓인 3개의 석조계단 위에 ‘丹齋影閣(단재영각)’이라는 현판이 걸린 본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물림집으로 마루가 깔린 통칸방에 분합문(分閤門)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사당 주변에는 기와를 올린 나즈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신채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집터였던 사당 뒤쪽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호석이 없는 아담한 봉분 앞에 한용운(韓容雲), 오세창(吳世昌), 신백우(申伯雨) 등이 세운 묘표(墓表)와 상석(床石)을 놓았다. 상석 오른쪽에는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고 봉분의 정면 중앙에는 명등석(明燈石) 1기,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서 있다.
* 민족주의자 단재 신채호에 대하여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대전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다 1929년 체포되어 1936년 2월 21일 중국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옥사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主筆)로 활약하면서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홈페이지
🗺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 (낭성면)
🔎 이용 안내
문의 및 안내
043-201-0916
주차 시설
주차 가능
유모차 대여 여부
없음
신용카드 가능 여부
없음
애완동물 가능 여부
불가